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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수 목사의 중국 선교] 고구려 옛 도읍 방문기 ⑧

이번 선교 여행중 단동시조선족중학교 윤청 교장님과 별도로 요청을 받은게 있다. 윤 교장은 특색있는 민족학교를 만들고 특히 세계화 속에 경제대국을 일궈낸 한국을 배우게 하여 우리 민족이 미래 세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인재 양성에 힘쓸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이 부탁을 받고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압록강 건너 신의주를 바라보며 민족학교로 발돋움하여 북한 동포를 자유세계로 통일한국으로 이끌어 줄 인재를 키우는 것이 조선족의 사명이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윤 교장님의 뜻에 나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인가’ 라고 깊이 생각해 보지만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미국에서 사용하던 중고 컴퓨터라도 알아볼 요량으로 가능한 협조하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알고 보니 중국으로 들여오는 일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막대한 세금도 부과된다. 현재 컴퓨터의 중국내 구입 가격은 1대당 375달러 정도이다. 그렇다면 전국 교회와 교역자들 그리고 후원자들을 모아 40명이 동참하면 올해 단동시중학교의 컴퓨터 교실이 문을 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동포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교육열이 남다른 조선족 부모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단동이지만 학생들은 대부분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다. 특히 북한과의 국경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자라는 꿈나무들은 친북 성향으로 크게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잘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게 동포애를 가지고 자유 대한민국의 자화상도 심어주어야 할 절실한 사명감도 느꼈다. 더구나 전산화 시스템을 몇 년째 사용하지 못하고 많은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손으로 업무를 진행하며 이웃 한족 학교에 가서 컴퓨터를 빌려 쓰는 애처러운 모습은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이번에 펜을 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남과 북이 정을 통할 수 있는 곳 압록강변 단동은 미래 통일한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또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꿈나무들의 배움터이다. 단동 역시 한류문화에 힘입어 한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바라보는 단동은 안타깝게도 어둡고 딱딱한 긴장된 도시로만 인식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늘 경계하고 대립적인 시각만을 견지해 왔었다. 중국과 북한간의 국경지역 여행을 통해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욱 불타올랐다. 압록강과 신의주를 바라보며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강건너 지척으로 볼 수 있는 가장 가깝고도 먼 곳. 이곳이 남북통일을 여는 창구의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다. 북한 접경지역에 살고 있는 이곳 농촌 출신들의 어린이들이 모여진 배움터에 남한과 워싱턴 동포사회의 따스한 온정의 손길이 닿는다면 미래 조국 통일의 근간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처럼 미래에 투자하는 것도 큰 보람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과 동포사회의 도움을 기다린다. 375달러면 중국 땅에서 자라나는 우리 조선족 동포의 꿈나무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저들은 우리의 적은 도움으로 민족의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 빨리 전산실 개원에 필요한 40명이 자발적으로 나서주길 기도하며 다소 장황했던 중국 선교 보고를 마친다. <끝> ▷후원문의: 917-861-2333, dsdsshin@hanmail.net ▷주소: 6482 Bock Rd. #310, Oxon Hill MD 20745 신동수 목사(Rev. Dong Soo Shin) 프라미스랜드교회 담임

2010-09-14

[신동수 목사의 중국 선교] 고구려 옛 도읍 방문기 ⑦

북한 후학 양성 전략 배울점 많아… 단동, 관심 갖고 지켜나가야 할 요충지 북한 평양에는 김일성 종합대학이 있다. 어느 분으로부터 이 대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다. 김일성 종합대학에는 김일성의 놀라운 전략이 있다 한다. 바로 전쟁 당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배려하는 법을 만들어 1951년 희생자 유자녀들을 위한 학원이 설치됐다는 것이다. 전쟁고아들을 대거 입학시킨 것이다. 보육원과 초등학원 등에 입학시켜 먹을 것을 주며 입을 옷도 주며 소련에 유학도 시켜주었다는 것이다. 고아들을 우대한 이유가 있었다. 저들은 훗날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다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명목상의 어버이 수령이 아니라 자기 친부모 이상의 아버지로 모시게 된 것이다. 현재 북한 권력 서열의 핵심 간부는 전쟁고아 출신자들이 대부분이라 한다.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단지 명예로운 행동만이 아니다. 오직 ‘나를 키워주시고 먹여주시고 공부시켜주신 어버이’를 위해서이다. 이쯤이면 무엇이 나라를 위하여 저들을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키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단동은 우리 한인들과 조선족들이 힘을 모아 꼭 지켜나가야 할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라도 태극기가 굳건하게 잘 꽂혀 있어야 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친북한 성향이 가장 농후한 지역인 것은 조선족 1만8000여명 중 북한화교가 3000명, 북한 주민이 3000여명이 거주하여 보이지 않지만 북한화전략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1500명 정도로 파악되는 이곳은 한인사회가 스스로 만주 벌판 압록강변의 독도라고도 말하고 있다. 지난 천안함 사태 때도 가장 실질적인 긴장감이 크게 동요했던 지역이 바로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대인 단동시였다. 재외공관도 없고 대기업도 없는 이곳의 교민들이 외로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미래 한국과 중국과 세계를 위해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2007년 개교 60주년 경축대회를 성황리에 가진 단동시조선족중학교가 60년간 민족 교육을 중심으로 이끌어 왔다고 한다. 1947년 건립된 60년 역사를 가진 민족 학교의 부지는 면적은 11.5평방미터, 건축면적이 1.08만평방미터로 종합교사청사, 기숙사와 시설이 완비된 운동장이 구비되어 있다. 학교는 현재 소학부, 초중부, 고중부로 구성돼 있고 20개 학급에 학생수는 630명, 교직원이 68명이다. 개혁개방이래 학교의 민족교육은 부단히 발전을 가져와 80년대 초 200여명던 학생 수는 현재 630명으로 늘었다. 앞으로 계속 늘어날 추세에 있으며 학생들은 대학 진학률이 매년 증가 되면서 1986년에는 고중졸업생의 대학진학률이 68.7%에 달했고 2000년부터는 95% 진학률을 보이고 있다고 하니 민족교육에 대한 자부심이 일었다. 학교에서는 지, 덕, 체를 고루 교육해 국가급 각종 학과 경기에 좋은 성적을 얻어내고 있다. 체육, 예술, 특히 배구, 축구, 관악, 무용, 음악 등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발휘한다고 한다. 학교 측은 교육의 보람을 갖고 민족교육을 발전시켜 이곳에서 배출된 꿈나무들이 장차 세계적인 재목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학교 지도부와 전체 학생들은 특색을 가지고 현대화, 국제화 수준을 잘 갖추고 있다. 또 전국 일류 수준의 민족학교와 국제 학교로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한가지 애로사항이라면 민족학교란 특수성 때문에 정부에서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학교는 7년전 신축교사를 완성했을 당시 정부에서 47대의 컴퓨터를 갖춘 전산실을 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컴퓨터는 몇 년 전부터 말썽을 일으켜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학교 측은 컴퓨터교실을 다시 열고 싶지만 적지 않는 경비로 고민하고 있다. <계속> 신동수 목사 프라미스랜드교회 담임

2010-09-07

[신동수 목사의 중국 선교] 고구려 옛 도읍 방문기 ⑥

조선족에 그리스도의 사랑 전파해야 한 사람의 영혼 구원이 신앙의 씨앗 남진 정책의 일환으로 북위 등 중국 국가들과의 화해의 몸짓으로, 또 왕건만큼이나 막강했던 국내성 호족들을 견재하기 위해서 결정된 평양천도는 그야말로 연화에겐 절망 그 이상이었다. 이미 왕의 첫사랑으로 알려진 연화였기에 질투하는 왕비 및 후궁들의 시샘과 반대에도 부딪치게 돼 평양성까지 따라 갈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안타갑게도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떠나는 날, 연화는 행렬의 먼발치에서 눈물로 사랑하는 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갔다고 한다. 연화가 오열할 때 행열은 압록강을 따라 오골성과 박자성을 지났다. 행열이 압록강의 끝자락 안동(지금의 단동) 지역에 이르자 왕은 그제서야 모든 행열을 멈추게 하고 모든 신하에게 3일간 유숙할 것을 명한다. 이제 압록강을 넘으면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되고 다시는 단동 땅에 다시 돌아오리란 기약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왕은 모든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일간 누구도 자신을 찾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연화를 만나러 간 것이다. 행열 뒤편으로 거의 실신지경의 몸으로 힘겹게 따라오던 연화를 발견한 장수왕은 한달음에 달려가 뜨겁게 그녀를 품에 안고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역사적 일화가 있는 단동에서 5월 단오날 조선민족의 행사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날 조선족들은 화기애애하게 하루를 보내며 즐겁게 교제를 나누고 민족애를 다진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도 역사적 가치가 있고 같은 민족이 터를 잡고 있는 단동을 위해, 그리고 압록강 저편 신의주와 북한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으면 좋겠다. 장수왕이 연화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저들을 사랑하여 함께 구원받고 천국 가는 복음의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함이 얼마나 큰가를 먼저 돌아 보아야 한다.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즉 조선족들을 기독교의 사랑으로 녹여야 한다. 10년전 조선족의 한 유치원을 도우며 조선족 교사 10명과 한족 교사 2명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원장을 전도하면 10명의 조선족 교사들이 전도될 것이란 가능성을 갖고 접근한 것이다. 하지만 몇차례 만남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도록 전도하기가 퍽 어려웠다. 만일 이 일을 정부에서 알게 되면 유치원 원장은 파면 당할 뿐아니라 신변에 위험도 따를 때였다. 전도하는 자도 중국 입국에는 문제가 될수 있었다. 지극히 지혜를 짜 대화 중에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는 불교가정에서 자랐다고 나 자신을 고백했다. 그리고 미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 국가임을 알고 있기에 미국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처음으로 얘기를 했다. 다음날 나를 안내하는 자동차 안에서 살짝 김홍도 목사의 소책자 ‘불기둥’이란 책을 보여 주었다. 그것이 단초가 돼 그는 신앙생활을 하게 됐고 지금은 매우 열정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결국 10명의 교사들도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재삼 깨닫게 된다. 이번 중국 여행에서도 신앙인들 몇을 만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중국 땅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다 덮음 같이 열매 맺는 일을 위해 더욱 매진하고 싶다. <계속> 신동수 목사 프라미스랜드교회 담임

2010-08-31

[신동수 목사의 중국 선교] 고구려 옛 도읍 방문기 ⑤

압록강을 따라 2000년전으로 올라가면 그 시절이라고 해서 전쟁과 슬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환인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단동으로부터 3시간 정도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주몽이 일하던 곳 환인에서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수도인 집안시 국내성으로 옮기고 425년 간 강성대국을 이룬 지역, 19대왕 광개토대왕을 거쳐 20대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를 실행하기 위하여 압록강변의 국내성, 당시 동북아 최대강국인 고구려 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이어서 큰 보람을 느낀다. 그럼 이젠 전설처럼 전승되고 있는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당시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거련(훗날 장수왕)은 오녀봉 청석골 석공장의 딸 연화를 무척 사랑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두 사람에게 큰 시련이 닥쳐 왔다. 그것은 태자의 신분을 숨기고 만난지 2년쯤 되던 시절이다. 갑자기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승하하면서 졸지에 왕위를 승계 받아 광활한 고구려의 제20대 왕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연화에게는 절망의 소식이 됐다. 매우 천한 신분인 연화는 처녀의 몸으로 후궁으로도 들어 갈수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연화는 고구려왕으로 즉위한 장수왕 근처에도 접근 할 방법이 없었다. 할수 없이 연화는 성밖에서 절망과 슬픔을 머금고 오로지 임이 성군이 되시기만을 기원할 뿐이였다. 물론 장수왕 역시 바쁜 국사를 뒤로 한 채 첫사랑의 연화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그녀를 다시 만날까 하는 궁리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묘안을 찾았다. 연화의 아버지를 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 왕실에 관습은 왕이 죽은 뒤에 후임 왕이 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임 중에 미리 자신의 묘를 만들어 놓았다. 이같은 궁궐 관습을 명분으로 장수왕은 오녀봉 석공장이였던 연화의 아버지를 왕릉 건축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묘를 거대한 피라미트 형태의 석묘로 만들었다. 장수왕은 이를 계기로 사랑하는 연화를 자주 만나고 그 아버지 석공장이를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였다. 결국 그들은 영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오녀산봉에서 돌을 운송할 수단이 없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장수왕은 그러나 끝까지 이를 고집하여 관철시켰다고 한다. 왕릉의 건축이 끝나자 이번엔 더 큰 시련이 다가왔다. 즉위후 14년차에 고구려가 평양 천도를 결정한 것이다. <계속> 신동수 목사 프라미스랜드교회 담임

2010-08-24

[신동수 목사의 중국 선교] 고구려 옛 도읍 방문기 ④

압록강변 곳곳 냉전의 상흔 여전, '언제나 통일 될까' 착잡 고구려 시대의 중심 지역, 현대에도 계승되길…염원 유람선을 타고 망원경을 빌려 북한을 유심히 바라보는 동안 마음은 찹찹하고 가슴 깊은 곳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언제 저들에게도 자유와 평화가 찾아 올 것인가. 압록강은 말없이 침묵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다. 강 상류로 올라가면 수풍댐이 있고 철조망 하나 사이에 잃어버린 조국 북녘 땅을 만질 수 있는 곳. 그러나 남과 북의 통일은 요원한 것일까. 단동은 역사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6.25때는 항미 원조로 중국이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도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압록강 한복판에 초대형 전쟁기념관을 세워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현재는 중국과 조선의 국경의 의미가 강해져 버린 압록강의 역사는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더 깊은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이곳이 고구려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를 통해서 기록된바 기원전 37년 주몽이 나라를 세운 환인의 졸본성도 역시 압록강의 핵심 지류인 혼강 유역이라고 하며 압록강은 옛고구려 역사 및 우리민족 생활사의 중심이었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희망하고 있다. 건국 수도 졸본성, 그리고 오녀산성이 요녕성 환인에 자리 잡고 단동에선 3시간 정도의 거리이며 강 복판의 위화도는 태조 이성계가 이른바 ‘위화도 회군’을 통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시발점이다. 위화도를 포함하여 압록강 중간에 있는 땅들의 대부분 북한 영토로 되어 있다. 단동시에는 단동 8경이라 해서 절경들도 즐비하다. 제1경은 압록강 수풍댐이며 단동에서 90km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1944년 일본에 의하여 건설 되였으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아시아 최대 규모 댐으로 명성을 떨쳤었다. 제2경은 황기산 산림원이다. 단동에서 1시간 압록강 상류로 따라가면 관전이란 곳이 나오며 그 인근에 병풍절벽이 태고의 신비를 자랑한다고 한다. 제3경은 호산장정이으로 고구려 시대의 박자성이었던 곳이다. 조각배를 타면 1m 코앞에 북한땅을 스치고 국경 수비대의 병사들과 마주 치는 곳이다. 제4경은 위화도이며 제5경은 압록강 단교라고 한다. 특히 단교는 1950년 미군이 폭파시켜 한반도 냉전시대의 산물이 되였으며 지금은 단동 관광지로 6.25와 통일의 시대를 상상하게 해 준다. 그외 월량도, 금강산공원, 전쟁기념관이 있어 관광객들을 유치하기에 바쁘다. 나는 이곳에 중국 단동시 조선족 문화예술관장의 초청으로 특별 참석하게 되었다. 다행히 중국 정부에서 5월 단오를 국가 공휴일로 정하고 소수민족중 하나인 조선족의 문화유산을 자손들에게 전하고저 단오절 행사로 씨름대회, 그네타기, 널뛰기, 제기차기, 윷놀이, 노래와 춤의 순서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초청을 받아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으며 이번 방문 길에 씨름대회에 1등 상품으로 내걸린 황소 1마리를 기증해 미국 한인 동포들의 사랑을 저들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신동수 목사/프라미스랜드교회 담임

2010-08-17

[신동수 목사의 중국 선교] 고구려 옛 도읍 방문기③

약 10년 만에 옛 만주 벌판, 압록강변의 중국 동북 3성의 관문인 단동시를 다시 찾았다. 북한이 신의주 특구를 발표 했을 때 큰 기대도 했지만 압록강 최남단 북한 신의주 땅과 마주한곳 단동은 말 그대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중국과 북한의 최대 국경 도시인 단동은 북한과 중국 무역의 90% 이상을 관장하는 교역 요충지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다리 한번만 건너면 왕래할 수 있는 지역 특성상 이곳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친북 성향이 매우 강하다. 북한 영사관이 주재하고 김정일 방중 통로도 이용되는 곳이다. 이 지역에는 북한 기관원이나 상사들도 눈에 자주 띈다. 단동시 인구는 70만명에 달한다. 이중 조선족은 1만8000여명, 북한주재 공관원·상사 등이 3000명 정도, 북한 화교가 3000명, 한국인은 1500명 가량이 생활하고 있다. 이곳에서 한국 상품의 인기는 대단하다고 한다. 나는 환인에서 2박을 하고 단동으로 향하는 도중 유람선을 타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수중 동굴을 관람했다. 이어 단동까지는 승용차를 타고 약 3시간 소요됐다. 숙소는 요녕성 단동시 중급 인민 법원 옆 호텔로 안내받았다. 호텔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전경이 일미였다. 창밖에는 압록강이 말없이 흐르고 강 중간 숲이 우거진 벌판이 빌딩숲과 잘 어울어져 있었다. 그곳이 바로 위화도(고려말 이성계가 이끄는 군사가 회군하여 고려를 멸망시킨 역사적인 지역)였다. 중국정부에서 50년간 이 지역을 개발 한다고 한다. 호텔 아래 300미터 떨어진 곳에 압록강 철교와 다리가 위치했다. 이곳을 통해 북한으로 드나드는 화물 차량들이 눈에 띈다. 10년 동안 단동은 쉴 새 없이 변화했지만 같은 기간 불변의 땅 신의주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단동시는 압록강변을 끼고 수많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그 발전상에 놀라게 된다. 올림픽 이후에 중국은 급변했다고 한다. 완전히 세계화로 탈바꿈한 것이 가는데 마다 느낄 수 있었다. 공공건물로부터 아파트 단지까지 확 트인 도로로부터 자연친화형 공원을 만들어 아침이면 사람들이 걷기운동이나 요가 등으로 건강을 지킨다. 사뭇 평화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강건너 북녘땅 신의주는 어두컴컴한 죽은 도시나 다름없다. 사람들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배를 타고 북한으로 접근해 망원경으로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 모두가 풀죽은 모습으로 군데군데 2~3명 정도가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듯 보인다. 그사이엔 반드시 군인들이 총을 들고 2명씩 짝을 지어 지켜서 있는 모습이 측은했다. 더구나 칙칙한 담벼락에는 선동적인 문구들로 가득했다. ‘21세기에 태양 김정일 장군’, ‘위대한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허물어져 가는 마굿간처럼 생긴 담벼락에 뭐하자고 쓸데없이 낙서를 해놓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계속> 신동수 목사/프라미스랜드교회 담임

2010-08-10

[신동수 목사의 중국 선교] 고구려 옛 도읍지 탐방기②

세계문화유산인 오녀산 산성의 서남쪽 기슭 혼강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는 오녀산 박물관은 환경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박물관 조형도 특이하게 지어졌다. 이곳은 옛 고구려와 요금역사시기에 진귀한 고물들 600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박물관은 모두 5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1부는 서막청으로 오녀산과 고구려민족의 개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 제2부는 오녀산과 주위에 초기 거주민을 소개하고, 제3부에서는 고구려 건축 양식과 고구려의 평원성, 공위왕도의 주위산성, 초기적 석묘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4부는 고구려의 흥성한 시기에 오녀산성을 소개하며 군사적 가치성을 진술하고 있다. 마지막 제5부는 10세기 이후 오녀산성의 모습과 유적, 유물, 건주 여진족이 환인에서 활동한 상황 등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박물관에서는 고구려 민족의 발전 역사를 한눈에 그려 볼 수 있다. 특히 혼강 유역에 여러민족 문화를 통해 옛고구려 민족이 찬란한 역사 문화를 꽃피웠던 역사를 쉽게 이해 할수 있어 고구려 교육의 장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생긴 천년의 요새인 오녀성산의 해발 823미터 정상을 오르는데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했다. 최소한 60-70도의 급경사를 오르기에는 다소 벅찬 느낌이다. 겨우 한 사람 밖에는 진입할 수 없는 좁은 길을 지나야 하는 등 여정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맘을 단단히 먹고 안내자와 함께 가파른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로 했다. 다행이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관광객들을 위한 999층계의 계단이 마련돼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에 올라서니 망치만 하나들어도 어떤 적도 두려울 것이 없이 든든해 보였다. 가히 천년의 요새라 할만 했다. 이곳에 기원전 37년 주몽이 졸본(지금의 환인)에 고구려를 세우고 오녀산에 첫 도읍을 구축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40년을 존속하였다고 전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정상에 바위돌로 쌓여진 곳에 천지 샘물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아마 이 수자원을 기반으로 고구려 왕궁은 2000년전 굳건히 세워졌으리라 믿는다. 이 같은 사실은 이곳 기록으로도 잘 남겨져 있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전경은 경관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혼강이 흐르는데 마치 태극 문양을 그리며 굽이쳐 흐르고 있어 태극의 정기가 주변에 그대로 전달되는 듯 하다. 이같은 경관을 두고 현지인들의 장황스런 설명이 이어진다. 현재 혼강은 수력 발전소가 건립돼 인근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이 강 건너편으로 아름다운 도시 환인이 시야에 들어온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새로운 도시 계획으로 멋진 시가지들을 만들었다. 시대가 갈 수록 중국의 변모를 다시 읽을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바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정상이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의 옛 자치지구였다는 사실이 감격으로 다가왔다. 그 용감한 주몽이 다녔던 곳, 지금은 묘지와 왕궁의 옛터전, 주춧돌 등만이 남아 있지만 지금도 생수는 흘러 내려 목마른 자들을 적시운다. 돌멩이 하나만 굴러 내려도 생명을 보장하기 어려울 듯한 가파른 언덕 산정상에서 내려가려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행히 관광객을 위한 마차가 마련돼 있었다. 졸본성 정상에서 박물관을 지나 다시 환인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중국동포의 한 가정으로부터 안내를 받아 한국과 그리스전 월드컵 축구 경기를 지켜보며 하룻밤을 맞이했다. 신동수 목사(프라미스랜드교회 담임)

2010-08-04

[신동수 목사의 중국 선교] 고구려 옛 도읍지 탐방기①

지난 6월 12일 옛 봉천이라 알려진 심양 공항에 첫발을 내딛었다. 어두컴컴하고 황량한 분위기였지만 10년전과는 달리 입국 수속은 간결했다. 여행 가방을 끌고 나오는데 내 이름 석자를 쓴 팻말을 쉽게 발견하고 밝은 표정으로 맞아준 두 내외에게 인사를 나눴다. 이곳에서 목회하시는 전도사님의 둘째 아들 내외로 모두 젊었다. 환인현에 교회가 있다며 안내하는데 주변 산야가 푸르고 몹시 아름다웠다. 중국은 시(市), 다음을 현(縣)이라 부른다고 한다. 심양국제공항에서 약 3시간 떨어진 곳 환인현이 옛날 고구려 첫 도읍지 졸본성이며 오늘날 중국 요녕성 환인이다. 몇해전 방영됐던 한국 드라마 ‘주몽’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역사적 유적지가 바로 이곳이라니 더욱 흥미로워진다. 어느덧 교회에 도착, 이곳에서 목회하시는 서은혜 전도사와의 해후가 반가웠다. 서 전도사는 10년전 신앙생활을 시작할 무렵 나에게 찾아와 신앙상담과 기도를 받았던 분이다. 다음날 주일 아침, 교회에 모여든 신도들의 모습은 대단했다. 한국에 60년대 말 뜨거운 모습과 흡사했다. 중국 교회에서 원래 외부인은 설교 할 수 없다는 것이 그곳 실정이나 “믿습니다”라는 믿음으로 나를 강대상에 세운 것이라고 귀띔을 해 준다. 1부, 2부 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점심식사를 제공했는데 참석한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오후엔 중국 원주민들이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린다. 80-90명 정도가 목회자도 없어 외부 강사를 초빙하면서도 열심히 모여 예배를 드린다. 점심시간에 함께 식사를 나누는데 옆에 김혜순씨라는 사람을 나에게 소개해 준다. 김씨는 탈북자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대화중엔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너무도 처절한 내용들이다. 너무 배가 고파 북한에서 살 수 없고 어린 자식 죽일 수 없어서 중국으로 밀입국해 돈 좀 벌어 고향으로 가려고 압록강에 안내자(부록가)를 통해 건넜지만 사기꾼을 만나 인신매매를 당하고 나중에는 중국 시골 무식한 농촌에 중국 남자에 팔려 결혼해 살아라는 공갈에 몇 년을 살다가 말은 통하질 않고 더구나 남편의 구타를 견디지 못해 도망쳐서 지금 환인이란 이곳에 숨어 들었다고 한다. 김씨는 조석족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조선족 목민교회에 출석하며 은혜 받고 살아간다고 눈물 흘리며 간증을 하신다. 이처럼 중국 국경지역 근처에 오면 내 동족들의 뼈아픈 사연들을 듣게 돼 너무 슬프다. 점심 후에 어느 분을 통해서 오녀성산에 잠시 관광 안내를 받게 되었다. 택시를 타고 8.5Km 떨어진 곳으로 달려가니 오녀산 박물관이 먼저 나온다. <계속> 신동수 목사 프라미스랜드교회 담임

201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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